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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⑥몽골제국은 왜 100년만에 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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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⑥몽골제국은 왜 100년만에 망했을까
  • 오은지 기자
  • 승인 2020.04.27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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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제국의 확장과 몰락

초원이나 사막지대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주변의 강력한 농경정주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농경정주민들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자신들 세력을 초원과 사막 바깥으로 확장시켜 농경정주국가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농경정주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유목민족 특유의 야성을 잃게 되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칭기즈칸 마동상에서 내려본 게르의 경관, 몽골의 역사는 몽골제국 시기를 제외하면 부족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점철되는 역사이다. 몽골 고원의 폭발적 전투 에너지를 조직화해서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동서세계를 연결했다는 것이 칭기즈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칭기즈칸 마동상에서 내려본 게르의 경관, 몽골의 역사는 몽골제국 시기를 제외하면 부족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점철되는 역사이다. 몽골 고원의 폭발적 전투 에너지를 조직화해서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동서세계를 연결했다는 것이 칭기즈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유목민족들은 원래 전투력과 기동력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 없이도 넓은 지역에서 속도전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농경정주국가를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한 이후에는 농경정주민의 문화에 빠져들어 전통적인 군사적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농경정주민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농경지역에서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게 되면 제국은 강력한 위협인 유목민족을 단합할 수 없도록 분열시킨다. 유목민들은 치열한 내분으로 분열된다. 이렇게 하여 유목제국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제국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칭기즈칸의 생애도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당시 금나라와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섰다.

제국의 흥망성쇠는 세금과 불가분의 관계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제국들은 모두 효율적인 조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현대에 두루 쓰이고 있는 조세 제도의 기본적인 체제를 갖췄다. 고대 이집트는 우수한 관료 제도를 만들어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대영제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7개의 바다를 지배한 것은 통계학을 구사한 합리적인 조세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국가 건설에 반영하는 것’은 제국이 융성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제국이 쇠퇴할 때는 조세 시스템이 흔들린다. 로마제국 말기에는 징세인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제국 내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로마제국 붕괴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이 종교와 특권을 이용하여 세금을 회피하고 그 부담이 국민에게 전가되면서 국민의 불만이 폭발해서 발생했다. 무장봉기, 혁명, 국가분열, 국가붕괴는 거의 대부분 탈세와 세금 제도의 허점과 얽혀 있다.

 

몽골제국은 왜 100년만에 망했나

팍스 몽골리카. 유라시아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던 몽골제국은 번영은 고작 100년남짓 이어졌다. 몽골제국의 성공요인만큼이나 쇠퇴원인 또한 흥미롭다. 몽골제국의 쇠퇴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건축가는 건축문화가 없어서란다. 어떤 종교인은 윤리의식과 공동체 정신의 실종으로 본다. 역사학자들의 정설을 정리해본다.

첫째, 소모적인 후계자 경쟁이 있었다.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기에 권력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 속도 또한 빠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테크노 헤게모니(기술 주도권)의 상실이다. ‘머스킷’이라는 총의 등장은 몽골제국의 퇴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 총에 맞아서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총소리에 놀란 말들이 대오를 이탈하다 보니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고, 훈련 속도가 머스킷의 개량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몽골군의 가장 큰 무기였던 기동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셋째, 정체성의 상실이다. 칭기즈칸은 말년에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라 했다. 몽골제국의 후대 지도자들은 이 충고를 되새기지 못하고 정착 생활의 안락한 환경에 안주하고 말았다. 그들의 존재 기반이었던 유목정신을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결국 제국이 쇠락하게 된 것이다.

칭기즈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평생 게르를 떠나지 않고 유목적 삶의 양식을 지켰다. 그는 타타르라는 큰 부족을 물리치고 난 후에도 자신의 무리를 부족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모전벽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아마 이때 칭기즈칸은 몽골초원의 모든 부족을 통일할 야심을 품기 시작했을 것이고 몽골초원을 통일하자 야심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 정복으로 확대된다.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 모전벽은 돌벽으로 바뀌면서 유목정신을 잃어버리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장사꾼이 본 몰락 이유, 재정파탄

 

 

장사꾼의 입장에서 몽골제국이 멸망한 이유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재정파탄을 꼽고 싶다. 칭기즈칸 사후에 몽골제국은 그 자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광대한 유라시아제국을 운영하면서 벼락부자가 된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엄청난 낭비벽에 빠져들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몽골제국 최고수장인 쿠빌라이칸의 4명의 황후에게 각각 1만명의 신하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쿠릴타이’라는 집회가 열리면 참여한 왕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포상을 했다. 몽골제국의 정치, 경제 주요 포스트는 몽골인들이 독차지하였는데 그 보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고위관직에 오르면 은 5000냥, 비단 6000필을 받았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감당이 안되었다.

몽골제국 말기 1211년 제정을 보면 세입이 약 4000만정 (1정은 50냥), 세출이 2000만정이다. 세입보다 세출이 다섯배가 많았다. 몽골제국은 막대한 재정적자를 소금 전매를 통해 메꾸려 하였다. 고대 중국부터 있었던 소금전매를 최대한 확대한 것이다. 소금전매 방법은 두가지다. 각 가정에 일정량의 소금을 나눠주고 그 대금을 세금으로 징수하는 ‘식염법’과 상인에게 ‘염인’이라는 소금교환권을 주고 독점적으로 소금매매를 하게 하는 방법이다.

소금에 비싼 세금을 매기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제국의 말기에는 소금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0%까지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소금 암거래업자인 ‘염도’라는 세력이 커졌다. 백성들은 싼 소금을 공급하는 염도를 환영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부터 소금 암거래 업자들이 큰 세력을 형성했다. 암거래 업자들 중에는 전촉을 건국한 완건, 오월을 건국한 전류같이 왕이 된 사람도 있다. 몽골제국 말기에도 초대형 소금 암거래업자 장사성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장사성은 스스로 성왕이라 칭하고 대주라는 나라까지 만들었다. 그는 최대 소금 산지인 평강까지 정복해버린다. 세수의 80%를 소금에서 거둬들였는데 최대 소금산지까지 빼앗겨버린 몽골제국은 결국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던 명의 시조 주원장에게 패해 북방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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