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우선주의’ 보조금 경쟁 본격화, 2025년까지 美와 동일 수준 ‘매칭 보조금’ 첫 도입
美·EU, '유럽산 핵심광물 IRA 보조금 대상 포함' 위한 협상 착수하기도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EU) 본부.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EU) 본부.

유럽연합(EU)이 전기차 배터리 등 친환경 산업에 대해 역외 투자와 동등한 수준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겨냥한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총 3690억 달러의 대규모 보조금을 뿌리는 것과 각종 보조금 제도가 있는 중국을 겨냥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결국 국가별로 자국의 산업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금 경쟁’이 현실화하는 셈이다. 이에 따라 국내 업계도 미국 IRA의 차별적 조치에 이어 EU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민관 차원의 면밀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9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회는 오는 2025년 말까지 친환경 기술 관련 보조금 지급 규정을 대폭 완화하기 위해 ‘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워크’를 채택해 시행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보조금 관련 규정을 수정·확대한 것으로, 전기차 배터리를 비롯해 태양광 패널·탄소포집 등 친환경 기업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도록 원활한 자금 조달 지원을 목표로 한다. 재생수소 등 아직 개발 중인 청정기술에 대한 지원 조건도 간소화하고 한도 또한 높여주기로 했다.

그동안 EU에서는 27개 회원국의 서로 다른 경제적 상황 때문에 자국에 진출한 기업에 보조금을 주기 위한 심사가 까다로웠는데 이 같은 보조금 규제를 풀기로 한 것이다. 이 혜택을 받는 대기업은 향후 5년간, 중소기업은 3년간 역외로 이전하지 않는 조건이 달릴 것이라고 현지 외신 등이 전했다. 이번 대책은 앞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공개한 친환경 산업 육성의 청사진인 ‘그린딜 산업 계획’의 일환으로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새로 도입된 ‘매칭(matching) 보조금’ 제도다. 이는 ‘EU 역외로 투자를 전환할 위험이 있는 기업’에 예외적으로 해당 기업이 제3국에서 받을 수 있는 금액과 동일한 액수를 EU 회원국이 지급하는 방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매칭 보조금 제도가 미 IRA로 인해 EU 역외로 투자를 전환할 위험이 높은 기업에 한해 예외적으로 IRA에서 받을 수 있는 보조금과 동일한 금액을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 IRA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특히 이같은 새 보조금 제도는 2025년까지 유효하며 일부에 한해서는 그 이후에도 지속될 예정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실제 앞서 유럽 최대 완성차 업체 폭스바겐은 동유럽에 신규 배터리 공장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북미에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폭스바겐의 전략 선회는 IRA에 따라 미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조금 때문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은 미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이 90억~100억유로(약 12조~1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FT는 “이번 조치로 EU 회원국마다 태양광 패널, 배터리, 풍력터빈, 전기분해기, 히트펌프, 탄소 포집 후 사용·저장 등의 산업에 투입해야 할 보조금이 수십억 유로에 이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한 이번 대책에는 매칭보조금 외에 재생수소처럼 아직 개발 단계인 청정기술에 대한 지원 조건 간소화, 지원 한도 상향, 보조금 산정 방식 단순화 등도 포함됐다.

외신들은 EU의 조치에 대해 하나같이 미국과 중국의 보조금 혜택을 겨냥한 결정이라고 해석했다. 유럽에 투자했던 기업들이 각국의 보조금 정책으로 투자 계획 변경을 검토할 상황이 되자 회원국 기업을 대상으로 보조금을 줄 때 반드시 승인을 받도록 했던 기존 입장까지 바꿨다는 뜻이다.

나아가 EU는 조만간 유럽형 IRA로 꼽히는 ‘핵심원자재법(CRMA)’도 공개한다. CRMA에는 현지에서 원자재를 생산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거나 중국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는 등의 공급망 안정화 장치 등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EU는 전기차 보급 확산의 의지가 강해 전기차와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 현지 공급망 구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전히 원자재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완성차‧배터리 업계도 CRMA의 강도와 방향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IRA로 갈등을 빚어왔던 미국과 EU는 보조금 경쟁과 더불어 타협을 위한 논의에도 착수했다. 미국과 EU는 지난 10일(현지시간) IRA의 전기차 보조금 문제와 관련, 유럽산 핵심 광물을 보조금 대상에 포함하기 위한 공식 협상에 착수하기로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회동한 뒤 배포한 공동 성명에서 이같이 밝혔다.

미국과 EU는 성명에서 “EU에서 추출·처리된 관련 핵심 광물이 IRA상 (전기차) 세액 공제 요구사항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한정된 (targeted) 핵심 광물 협정’에 대한 협상을 즉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EU에서 추출·처리된 핵심 광물에 대해서 미국에서 추출된 것처럼 미국 시장에 접근권을 주는 문제에 대해서 노력키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발효된 미 IRA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어 한국과 유럽연합(EU) 등의 반발을 산 바 있다. 특히 한국과 달리 EU의 경우 미국과 체결한 FTA가 없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EU는 배터리에 사용되는 핵심광물에 한정한 협정 체결 문제를 논의해왔다.

만약 미국과 EU간 핵심광물 협정이 체결될 경우 유럽산 핵심 광물이 사용된 전기차도 다른 조건을 충족하면 IRA의 보조금 지급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전기차 자체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돼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유럽산 전기차는 여전히 보조금 대상이 아니다.

현재 가시화하고 있는 지역간 보조금 경쟁과 관련, 미국과 EU는 이날 보조금 투명성을 위해 양측간 무역기술협의회(TTC) 차원에서 ‘청정에너지 보조금 대화’를 진행키로 했다고 성명에서 밝혔다. 양측은 성명에서 양측의 보조금 조정 방침을 밝힌 뒤 “보조금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무역 및 투자 흐름의 중단을 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우리는 보조금이 제로섬 경쟁이 되지 않고 일자리 및 청정에너지 확대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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