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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③ 몽골의 상업 네트워크, 유라시아 봉건제를 무너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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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③ 몽골의 상업 네트워크, 유라시아 봉건제를 무너뜨리다
  •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 승인 2020.03.30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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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 ‘얌(Yam)’은 몽골제국 네트워크의 핏줄이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 초까지 주식회사 몽골제국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Km에서 50Km마다 역참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마르코 폴로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역참을 자주 이용했다. 그는 이런 역참들이 ‘아름답고’, ‘으리으리할’뿐 아니라 ‘왕에게 어울리는 비단이나 다른 모든 사치품까지 갖추고 있다’고 묘사했다. 몽골제국은 이 교역로를 통한 무역을 장려하여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인 ‘파이자’를 나누어 주었다.

 

칸국 간 상부상조, ‘쿠비’체계

몽골제국이 무역로를 확장하고 유지했던 것은 그들이 상업과 교역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칭기즈칸 부족의 분배, 즉 쿠비(Khubi)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병사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까지 전리품의 자기 몫을 챙길 권리가 있었다. 칭기즈칸 혈족, 황금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제국의 각 지역의 부에서 자기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고려와 유럽, 페르시아에서 약탈한 물건들은 이 교역로를 통해 몽골고원으로 흘러갔다. 홀레구칸은 형제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에 비단 노동자 2만5천가구를 거느리고 있었고, 티베트에 골짜기 몇 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초원지대 북부의 모피와 매를 자기 몫으로 챙겼다. 쿠빌라이는 페르시아와 이라크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낙타, 말, 양, 염소 떼도 소유했다. 페르시아의 몽골인은 원나라의 몽골 황실에 향료, 강철, 보석, 짅, 직물을 공급했고, 원나라의 몽골황실은 페르시아에 도자기와 의약품을 보냈다. 쿠빌라이칸은 페르시아의 통역사, 의사, 나아가서 러시아 병사들도 만 명 정도 수입했다. 이 병사들은 수도 북부의 땅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이용했다.

몽골제국의 칸국들은 정치적으로 싸웠지만 경제적, 상업적으로는 협력했다. 중국, 중앙 초원지대, 페르시아, 러시아의 4개 지역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한 칸국이 다른 지역 칸국에 그들의 몫을 보내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그 칸국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적 이해관계는 정치적 분쟁을 극복하고 가동되었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오르톡과 역참 얌은 몽골에서 베트남까지, 고려에서 페르시아까지 최신 뉴스와 사람, 물자를 말이나 낙타 카라반에 실어 보냈다. 몽골제국 전역에 무역이 확대되자 더 빠르고 편한 새로운 길들이 뚤렸다. 티벳으로 뚤린 새로운 길은 중국과 티베트의 상업적, 종교적, 정치적 연결에 큰 기여를 했다. 쿠빌라이칸이 데려온 아랍의 지리학자들, 특히 자말 앗 딘 등은 1267년 쿠빌라이를 위해 지구본을 제작했다. 이 지구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섬들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까지 묘사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해상교통망을 건설하다

몽골제국이 아프로유라시아 전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꿰뚫는 해상교통망이 필요했다. 몽골제국은 일본과 인도네시아 자바 침공에 실패했지만, 그들은 조선과 해상운송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수상, 해상운송이 육상운송보다 값이 싸고 효율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해상운송을 발전시킨다. 아마 고려의 조선술이 몽골제국의 해상운송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쿠빌라이 칸은 제국내의 식량은 기본적으로 배로 운송한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몽골제국은 첫해에 약 3000톤을 배로 운반했지만, 1329년에는 그 양이 21만톤으로 늘었다. 몽골제국의 수도인 대도 (지금의 베이징)는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터미널이었다. 대도는 현재의 베이징과 달리 도시안에 항구가 있었고 운하를 통해 텐진으로 연결되었다. 항저우를 비롯하여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첸저우, 광저우 등의 항만도시로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양에까지 수많은 무역선이 항해했다. 중국의 남북이 해로로 연결되었던 것은 몽골 시대부터다.

마르코폴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항해하면서 돛대 4개짜리 커다란 정크선을 탔다. 이 배에는 승무원이 300명까지 탈 수 있었고 상인이 들어갈 수 있는 선실은 60개나 되었다. 중국 남부의 항구 취어저우에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에 이르는 길은 극동과 중동을 잇는 중요한 해상 연결로가 되어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가 이 해로를 이용했으며, 이 해로는 고려의 벽란도까지, 아라비아, 이집트, 소말리아까지 바로 연결되었다. 이 해로를 따라가면 베트남, 자바, 실론, 인도의 항구들과 이어지며, 이 지역에서는 유라시아 육로 실크로드에서 얻을 수 없는 설탕, 상아, 계피, 면화 등의 물자들이 사고 팔렸다. 중국의 첸저우(泉州)와 광저우(廣州)에서 떠난 경덕진(景德鎭)의 도자기는 동남아시아의 팔렘방 브루나이, 인도 남단의 여러 항구를 거쳐 서쪽 페르시아만에 임한 호르무즈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쪽의 흑해연안의 수다크, 지중해의 베네치아 제노아 등 항구도시로 다시 운반되었다.

 

중국에 이르는 길은 낮이나 밤이나 완벽하게 안전하다

몽골제국은 이 해로를 모두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인 교역관계를 맺어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몽골의 보호를 받는 무역회사 오르톡은 태평양 연안과 인도양의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은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해양 실크로드 지역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 남부의 오르톡들에게 외국 항구로 이주하여 교역기지를 설치하도록 장려했다. 몽골제국의 통치기간중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지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의 해안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다. 유럽시장 진출을 위해서 흑해 연안에 교역기지 설치를 장려하였고, 제노바 사람들이 크림 반도의 카파 항구와 타나에 교역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1340년에 출간된 상업 안내서 ‘상업의 실무(Practica della mercatura)’에서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콜로티는 ‘중국에 이르는 길은 낮이나 밤이나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이란, 이라크 지역의 제조업이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새로운 유라시아 무역 시스템이 만들어지자 중국 제조업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몽골제국의 중국정복은 중동정복만큼 파괴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쿠빌라이칸은 중국의 물자들이 중동 시장으로 팔리게 하는 동시에 무슬림과 인도의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광범위하게 이전되도록 만들었다. 몽골제국은 세계최강의 기마군단을 앞세운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최대의 중국 경제권을 합쳐버리고 오르톡이란 제도를 활용하여 무슬림 상업권을 내세워 제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몽골의 상업 네트워크, 봉건제를 무너뜨리다

13세기 말이 되면 오르톡 상인들은 유라시아 전역에 장사를 하려고 혈안이 된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70년대, 80년대 상사맨들과 당시의 오르톡 상인들이 비슷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한 지역에서는 싸고 풍부한 물자를 유라시아 반대편에 가져가면 새롭고 신기한 상품이라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염료, 약, 피스타치오나 폭죽,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팔릴 수 있었다. 중국의 작업장에서는 세계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도자기, 비단 등 전통적인 중국 수공업품만이 아니라 특수한 시장을 노리는 신상품도 출시했다. 예를 들어 상아를 수입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을 깎아 유럽에 수출하기도 했다. 상인이나 군인들이 가볍고 휴대하기 쉬운 카드로 놀이를 하면서 무역망을 통해 카드높이가 급속히 퍼졌다. 체스 등은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필요했지만 카드는 병사나 낙타몰이꾼이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카드의 수요가 커지자 종교경전을 인쇄하는데 사용하는 조각 나무를 이용해 찍어내는 방법을 도입했는데, 나중에는 인쇄 카드 시장이 종교경전 시장보다 훨씬 더 커졌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통합시키며 봉건적인 중세사회의 막을 내렸다. 몽골제국 이전의 국가들은 중국에서 유럽까지 대부분 상업을 더럽고, 부도덕한 활동이라고 멸시했다. 권력과 신앙을 독점한 자들은 상행위를 육체노동 직업과 같은 급으로 봤다. 유럽의 봉건귀족들은 자기의 장원에서 최대한 자급자족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생필품은 만들어 쓰며 사치품만 외부에서 가져다 썼다. 무역을 싫어했다. 봉건체제에서 수입된 물자에 의존하는 것은 곧 국내경제의 실패를 뜻했다. 중국의 왕조들도 전통적으로 상업을 제한했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무역을 제한하는 것이었으며, 나라의 부를 그 성벽 안에서 지키려는 시도였다. 중국의 관료들이 보기에는 무역은 이웃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가급적 교역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상인을 강도보다 한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무시하고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인이나 직업인들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켰다. 대신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유학자들을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낮은 등급으로 격하시켰다. 유라시아의 봉건제는 몽골제국의 상업 네트워크로 인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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